[렝가/카직스] 물 / 얼음

E / P 2016. 1. 28. 22:55

"…어이, 위험하니까 적당히 하라고."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충분히 위엄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위엄이고 뭐고 지금같은 날씨엔 안전이 우선이지."

"역시 사자의 기운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하는군."

"…내가 사자냐."


보이는 얼음이란 얼음들은 모조리 주먹으로 깨부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동상이라도 걸리는 건 아닌가 걱정하게 된단 말이지. 물론 저 녀석의 부상은 나의 기회이긴 하지만, 이렇게 비겁하게 이기긴 싫으니까. 얼음만 보면 깨부수려고 날쌔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한심하면서도 자신만의 단련이라고 생각하고만 있다. 더 파고들긴 싫기도 하고.

수풀이 물방울같은 것들에 의해 얼어버리면 저 사자 녀석에게도 나에게도 귀찮아지는 일이라서 녀석이 얼음을 깨부수는 동안 나는 수풀에 붙어있는 물방울이 얼지 않도록 (또는 얼어버린 물방울을 없애기 위해) 수풀들을 다듬는다. 내 모습에 무슨 정원사같은 일을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딱히 도와줄 녀석이 없으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작업해야 되지 않겠나. 

…사실 저 녀석이 얼음을 모조리 깨부숴준 덕분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일 같은 건 전혀 없기에 좀 고마워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하지만, 괜히 저 녀석 앞에서 감사표시라도 했다간 날 만만하게 볼 것 같아서 꾹꾹 참아가며 작업을 한다. 다행히 요즘은 얼어붙은 수풀같은 게 줄어들고 있어서 다행이긴 하다. 최근 많이 춥긴 했는데, 지금은 조금씩 날이 풀리고 있는 게 느껴지고 있으니까.

멍하니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뭔가 차가운 것이 내 몸에 닿는 것이 느껴져서 본능적으로 튀어오르며 경계 자세를 취했다. 당연히 사자 녀석의 짓이긴 했지만, 이 녀석 앞에서 이런 민망한 경계 자세를 취하게 된 건 좀 오랜만이라고 해야 될까…. 어쨌든 사자 녀석은 내가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보였다.


"…하, 젠장."

"어떤가. 얼음을 깨부순 강력한 주먹의 맛이."

"주먹의 맛이 아니고 그냥 차가운 손이잖냐."

"주먹이든 손이든 이 정도만으로 네 녀석의 경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건 깨달았지."

"…그냥 본능일 뿐이다만."

"어쨌든 작업은 잘 되어가고 있나."

"잘 하고 있는데 네 녀석이 방해해서 흥미가 떨어지고 있다."

"이런, 방해는 아니었는데. 그럼 같이 하겠나?"

"그래. 기껏 여기까지 왔으니 좀 도와라."


나는 계속 이 수풀을 작업하고 저 쪽에 아직 작업하지 못한 수풀을 가리키며 저걸 좀 다듬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나에게 되돌아와선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계속 관찰하기 시작했다. 왜 벌써 오냐…라고 생각하며 내가 가리킨 수풀을 보았는데 벌써 작업이 다 끝난 듯 싱싱한 모습의 수풀이 보였다. 쳇, 이번에도 한 발 놓쳤군.


"느리군."

"느린 게 아니라 꼼꼼한 거다. 네 녀석이 관리한 걸 보면 아마 어디가 안 되어있는 지 다 보일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과연 보일까. 완벽함을 추구하는 나에게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글쎄, 과연 그럴까."

"장담할 수 있다만."


내가 작업하는 게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생각했는지 이젠 사자 녀석도 내가 작업하는 수풀을 같이 작업해주기 시작했다. 솔직히 오늘은 너무 여유를 부리긴 했지만, 이렇게 도움까지 받게 될 줄이야…. 뭔가 수치스럽긴 했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고 싶어서 아무런 반항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겨우겨우 작업이 끝나고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사자 녀석이 나를 향해 일부러 웃는 소리를 크게 내더니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나를 끌어안고는 방으로 직접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이, 이거 놓으라고…."

"이런이런, 오늘 많이 수고했으니 이 정도 보상은 받아야지."

"…보답따위. 이런 건 항상 하는건데."

"항상 하는 것에서부터 받는 보상은 참 짜릿하지 않나."

"그런가… 뭐, 그럴지도 모르겠군."


보상이라… 솔직히 정말로 받아본 적도 없었고, 늘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아무런 감흥도 없었지만, 내심 나를 생각해주고 있었다는 점에 조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 녀석은 내가 웃는 모습에 같이 웃어주기만 했을 뿐. 아마 다른 음흉한 목적같은 건 없는 듯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