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 로메로 필라이트 / 키네틱 디바이드] Mirage of the Mirror
고요한 새벽. 낮에는 따뜻했지만 밤이 될수록 조금은 추워지는 느낌도 든다. 이런 걸 일교차가 심하다- 라고 이야기하던가. 그래도 정말 심각하게 춥다-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다행이다. 만약 더 추웠으면, 로메로가 춥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테니까.
아무리 날씨가 추워져도 내 건강에는 문제가 없지만, 로메로에겐 그런 날씨 하나하나가 전부 민감한 문제로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추울 때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며 가끔은… 항상 추웠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상한 생각도 들긴 했지만.
새벽이라서 그런지, 로메로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안 자고 있는 내가 이상한 거겠지. 왠지 요즘따라 밤에 잠이 잘 안 와서, 그렇다고 잠을 안 잔다고 해서 크게 다음날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기계에게 굳이 잠이라는 게 필요할까? 뭐, 가끔은 다른 녀석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부러 잠을 안 자면 피곤해지게 설정하고 다니긴 하지만 지금은 왠지 내 원래의 설정으로 있고 싶었다. 즉,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은 그런 몸 상태라는 뜻이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잠시 몸이라도 풀 겸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닌다. 그 전에 혹시라도 로메로가 중간에 잠이 깨서 내가 없는 걸 보며 여러가지 생각을 할 것 같기도 해서 이렇게 무언가 흔적을 남겨두기도 했다.
「잠이 안 와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됨.」 이라고.
울창한 숲과 어두운 새벽의 조합이라, 주변에 보이는 게 거의 없긴 했다. 하지만 이런 풍경을 돌아다니는 것도 일종의 새로운 경험이 되겠지. 그리고 이런 곳에 다른 녀석들이 올 리도 없고, 그 녀석들이 위협적이라고 하더라도 내 능력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
주변을 돌아다니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들어서 그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뭐랄까, 나쁜 기운은 아닌데 이런 곳에서 느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기운이었다. 직접 목격해야 이걸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한 게 떡하니 놓여져 있었다. 그건 바로…
전신거울이었다. 도대체 이런 곳에 누가 저런 전신거울을 가져다 둔 거야? 처음 보았을 때도 정말 어이없었지만, 계속 보고 있어도 이 어이없음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거울이 있으니… 한번 보고 갈까.
뭐, 거울 아니랄까봐 아무리 계속해서 바라봐도 내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거울을 보는 건 오랜만이네. 예전에도 그렇게 자주 본 적은 없었지만 가끔씩 생각나면 거울을 보곤 했었으니까. 다른 녀석들도 그러는 것처럼 거울을 보며 이런저런 자세를 취해보기도 하고 그런다.
그렇게 여러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처음에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거울이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생각은 곧 진실로 드러났는데, 이 거울… 평범한 거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 모습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거울의 나 자신은 다른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다른 모습의 나 자신이 지금의 내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여서 어쩌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보고 있으니 조금 나 자신의 기운과는 다른 기운이 이 거울에서 느껴졌다.
…어쩌면, 이건… 내가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과거의 기억일까.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씩 나의 과거가 기억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잊고 싶어서 강제로라도 묻어두고 있었던 것이겠지만.
거울 속의 나 자신은 나를 바라보며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긴, 과거의 나 자신이었다면 충분히 지금의 나를 보며 이런 표정을 지었을 것 같긴 하다.
뭐랄까, 과거의 나 자신은 꽤나 치밀하고 냉정하고…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마침 거울에서 나의 예전 모습이 보인다.
그것도 시간 순서에 맞춰서… 하나하나씩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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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다음에 해야 될 일은…"
"…"
그 거울 속에 보인 모습은, 예전의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
"이 정도 일이면, 간단하게 해내겠지."
"명령 각인 완료."
그리고 무엇이든지 짧게 말을 끝내는 모습. 그 당시의 나는, 나 자신의 의지로 말을 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저 기계 신체에 인식되어 있는 그대로 꺼내는 말일 뿐, 내 진심이 담긴 그런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보인 모습은, 온통 피투성이인 상태로 다시 돌아온 나 자신의 모습. 아마 내가 다쳤다기보단, 자신이 다른 존재들을 처리하면서 흩뿌려진 그 존재들의 피가 자신의 몸에도 튀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임무 수행 완료."
"좋아. 수고했어. 오늘도 만족스럽군."
그저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그렇게 말하곤 다시 사라지는 누군가. 그런 모습을 보며 왠지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나 자신.
아마 그 때부터였지 않을까. 내가 정말 이런 일만을 하며 지내와야 되는 것일지.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임무를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조금씩 깨닫긴 했으니까 말이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존재들을 보며, 나 자신도 이렇게 누군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혼자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기계 신체 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기 시작한 것이겠지.
그렇게 멍하니 조금씩 떠오른 과거를 생각하고 있다가, 거울을 다시 바라보자 그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아마 그 때의 나는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임무 각인 거절."
"…허, 너도 이제 자유에 대한 의지를 느끼는 건가."
그 누군가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다른 곳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런 이야기를 꺼냈었지.
"네가 자유를 원한다면 지금 바로 나가도 좋아. 하지만, 그거 하나는 알아둬."
"…"
"이 곳을 나가는 순간부터, 모든 일은 너 자신이 다 책임져야 된다는 것을. 물론, 너를 다시 잡는다던가 하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거울 속의 나 자신이 그냥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니, 아마 그 당시의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고민 없이 바깥으로 나간 것 같다. 그리고 정말 그 이후로는 나 혼자서 이것저것 다 알아서 지내는 그런 삶을 지냈다.
다시 잡으러 온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기계 신체로서의 본능에 의해 계속 의심하며 지내곤 했지만- 지금까지도 이렇게 잘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 녀석들이 약속 하나는 정말 잘 지키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의문인 점은, 언제부터 내 성격과 말투가 이렇게 변했을까- 에 대한 점이었다. 처음엔 정말 냉정하고 그랬는데 어느샌가 모든 게 귀찮아지고 말투도 조금은 친근해진 그런 상태가 되었으니…
주변에 이런 타입이었던 존재가 있었나? 그것까진 기억이 안 나는데…
뭐, 어떻게 되었든 과거의 나는 그냥 과거의 내 모습인거고, 지금의 내 모습과 앞으로의 내 모습이 중요하겠지. 실제로도 지금까지 내가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가 좋았다느니- 그런 이야기는 안 했잖아?
…과거가 기억나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막상 알고난 뒤에도 그닥 큰 감흥은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거울을 너무 오랫동안 본 건가, 조금씩 태양이 뜨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제서야 로메로가 떠올라서 재빨리 로메로의 곁으로 다가가자, 로메로가 눈을 뜨며 몸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름대로 운이 좋았다.
그리고 재빨리 흔적을 남겼던 걸 없애며 마치 계속 여기 있었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 좋은 아침일세."
"응, 좋은 아침."
"키네틱은 잘 잤는가?"
"뭐… 나름대로."
"오늘의 태양이 뜨니, 오늘은 어떤 곳을 구경할텐가?"
"글쎄- 바람따라 구름따라 구경하는 게 우리들이니까 이번에도 똑같겠지."
방금 일어난 것처럼 몸을 쭉 뻗으며 나름대로 몸을 풀어주는 모습을 취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기도? 뒷일이 두려워서 그런건가.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좀 더 있다가 가도 괜찮아."
아직은 태양이 뜨지 않아서 여전히 조금은 추운 날씨인 것처럼 느껴지긴 했는지 로메로는 나를 바라보며 슬쩍 물어본다.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되겠는가?"
"응? 아, 물론이지."
코트를 활짝 펼치며 로메로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자, 로메로는 자연스럽게 내 안으로 들어와서는 내 코트를 덮는다. 온도 유지장치도 방금 작동시켰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바로 따뜻해지겠지.
아직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팔로 로메로를 감싸며 조금은 이렇게나마 빠르게 따뜻함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껴안아준다.
"방금 유지장치를 켜서… 시간이 좀 걸릴거야…"
"괜찮다네. 여유를 가지는 것도 좋으니."
"...그럼, 다행이고..."
내 과거를 깨닫긴 했지만, 아직은 로메로에게 말할 용기도 나지 않고, 지금은 말할 분위기도 아닌 것 같아서… 다음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는 자신있게 털어놓고 싶다.
사실 로메로도 그렇게 별 말 안 할 것 같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