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시디언 w. 크림슨] 181117
멀리서도 보이는 화려한 붉은 외형.
“여어- 거기서 뭐해-?”
“...뭐야, 너였나.”
가면을 벗고 있네? 항상 가면을 쓰는 친구가 가면을 벗고 있다는 건- 분명 어떤 일이 있어서이겠지!
“이번에도 가면이 너덜너덜하게 되어버린거야?”
“그렇다고 치지.”
“헤- 그렇다면 이 몸이 그냥 지나칠 수 없지!”
“...?”
케론군 쪽의 의뢰도 가끔 받던 게 있다보니, 그 쪽에서의 단골손님도 있기 마련이지. 그렇게 단골손님들이 나름의 보답으로 특별한 기능이 담긴 장치들을 만들어주거나 빌려주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 하나는 원격으로 물건을 보관해둔 보관함을 불러내고 다시 집어넣을 수 있는 장치였다!
이거, 단골손님들이 만들어준 장치들 중에서 제일 쓸모가 많더라구. 깜빡하고 물건을 안 가져온 게 있어도 보관함에 넣어놓기만 했다면 이거 하나로 바로 해결될 정도니까! 그래서 보관함에 물건을 넣는 게 버릇이 되었다니깐.
어쨌든! 보관함에서 크림슨이 항상 쓰고 다니는 가면을 직접 만들었던 것을 하나 건네주었다. 생각해보니, 이 가면... 추억이 담겨있는 가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
“만들어놓은 게 아직 남아있으니까!”
“...나에게도 여분은 충분히 있지만, 네가 만들어준 것이 편하게 느껴지긴 하더군.”
“히히! 자주 써먹었구나?”
“나에게 만들어준 것에 대한 정성을 내팽개칠 순 없으니.”
“가끔은 나도 이 가면을 쓰고 다니긴 하는데! 정확히는 비슷한 느낌의 가면이지만!”
“...그러냐?”
그 때의 모습을 플루토가 남겨준 게 있어서 다행이야- 이렇게 크림슨에게 보여줄 수도 있고.
크림슨은 이 모습을 보며 살짝 웃음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남들이 보면 마치 비웃는 것이나 깔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그런 모습이었지.
괜찮아! 이번에는 정말 재밌어서 웃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여전히 재밌게들 노는군.”
“재미있게 살아야지- 크림슨도 나중에 같이 놀자구!”
“...너희들끼리나 잘 놀아라.”
“헤- 마음 속으론 같이 놀고 싶은 거 잘 안다구-”
“필요없다니까...”
정말, 가면을 벗었을 땐 엄청 냉정하구나- 싶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고 가면을 벗을 일이 거의 없는 친구이기도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편이지만.
생각해보니 이렇게 가면을 만들어서 크림슨에게 처음 주었을 때가 벌써 1년이나 지났다. 그렇다는 건- 이 가면이 만들어진지도 일단 1년은 지났다는 뜻이네.
그 당시에는 케론군에서 이것저것 의뢰가 정말 너무 많아서 신경도 못 쓸 정도였는데 이렇게 보니까 시간이 빠르긴 하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에게 가면을 만들어준 지 벌써 1년이나 지났다는 게 신기하네-”
“...1년이나 되었다고?”
“응! 작년 이때쯤이었거든. 그 때의 내가 정말 바빴던지라 정말 가면만 툭 만들어주고 가던 정도였지.”
“그 때 그 가면...”
크림슨은 무언가 뒤적거리더니 가면 하나를 보여주었다. 가면 안쪽에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주 조그마한 초승달 마크가 새겨져 있는 가면 하나.
“앗, 그거...”
“...네가 만들어준 거니까. 함부로 다루지는 않았다.”
“거의 완전 새것처럼 다뤄줬구나...!”
“험한 일이라도 하게 되면 가면에 흠집이라도 날 테니.”
“의외로 그런 모습에서도 남을 챙겨주기는 하는구나-”
“...시끄러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크림슨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이유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보니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이유가 그 흉터같은 거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래.”
“확실히, 지금까지 봐왔던 흉터 중에서 크림슨 흉터만큼 선명한 걸 본 적이 없긴 하네.”
그리고 흉터가 생겼다는 건 그 쪽 부분으로 다친 적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그래서 시력이 좀 약하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그런 것이 공감되긴 했다. 왜냐면 나에게도 비슷한 경우가 있긴 있으니까.
팔의 날개를 쭉 뻗어보이며 다른 날개로 한쪽 날개의 깃털을 파헤치듯 이리저리 헤치자 그 속에 숨어있는 흉터들이 보였다.
“...? 너에게도 흉터가 있나?”
“헤헤, 그럼. 물론이지.”
싱긋 웃어보였다.
“나도 깨끗하게 자라온 건 아니라구. 과거에 다른 녀석들에게 괴롭힘을 받으며 생긴 것이라던지, 낫을 휘두르면서 깊게 베인 상처라던지... 흉터가 참 다양하게 생겼어.”
“...호오.”
“특히 과거의 괴롭힘으로 인한 상처는 날개가 아닌 팔이었을 때 생겼던 건데, 특이하게도 날개로 변했는데도 이렇게 깊숙한 부분에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더라구.”
다시 깃털을 다듬어서 흉터가 보이지 않게 원래의 날개 모습으로 되돌려놓는다.
“흉터라는 게 겉보기에 약점이 될 수도 있고, 남들에게 흉하게 보일 수도 있지. 나도 그 마음을 아니까. 그래서 숨기고 싶은 거고. 과거의 나 자신도 이걸 숨기고 싶긴 했었어. 지금은 이렇게 새로운 깃털이 계속 돋아나면서 자연스럽게 숨겨진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흉터가 ‘과거의 수치’ 라기보단 ‘그래도 이런 상처가 있어도 나는 끝까지 이겨내고 나아갔다’ 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일종의 성장 과정인 셈치고 가는 거지.”
...아직 내가 많이 어려서 그런 거일수도 있고?
“각자 생각은 다르겠지만, 나는 크림슨의 흉터를 보며 약점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한 적이 없어. 흉터가 꼭 약점이 될 필요가 있나? 게다가 크림슨은 다른 녀석들에 비하면 흉터도 엄청 멋있게 새겨진 편이니까, 오히려 위협적으로 보일 것 같은데! 그런 날카로운 눈매에다가 찢어진 듯이 생긴 흉터라니, 누가 겁 안 먹고 덤빌 수 있을까?”
“...너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이게 약점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누가 그래? 약점으로 보인다는 것도 그저 본인의 생각이라서 그런 거 아냐? 같은 해적단원이 보스에게 약점이라도 잡을까봐? 그러면 그 단원을 처리해버리라구!”
“처리라는 말을... 굉장히 쉽게 하는 것 같군.”
“그야- 내가 의뢰로 종종 받는 게 청부살인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아, 그랬었지.”
“왜-? 이 몸이 대신 처리해줬으면 하는 녀석이 있는거야-?”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아니다.”
한번쯤은 이 몸에게 부탁하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자기 손으로 피 안 묻히고 누구 하나 처리하는 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한번도 의뢰를 신청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의뢰를 신청한 사람은 없다- 라고 입소문 잔뜩 퍼질 정도라니깐!
그러다가 문득 ‘부탁’ 이라고 하니 조금은 예전부터 하던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씨익 웃어보이며, 후회는 없을 거라는 듯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만약에- 내가 쓸모없다고 느껴지면 그냥 조용히 거리를 두려고 하지 말고, ‘이제 다 썼으니 필요없다’ 라고 한 마디 정도는 해 달라구- 싶어서 말이지.
아마 조금 특이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네! 뭐- 큰 이유는 없고, 이 몸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후에 그 때쯤이면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그나마 잘 쓰이긴 했구나-’ 라면서 나름대로 좋은 생각을 하면서 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크림슨은 그저 말없이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아마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걸까? 아니면 그런 대답을 할지말지 고민하고 있는걸까? 내가 그런 것까지 다 파악할 수 있으면 의뢰 열심히 받는 사신이 아니라 그냥 신이 되었겠지. 에헤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니까! 그게 ‘도와준 것’ 보다는 ‘사용된 것’ 쪽에 가까운 의미일 수는 있어도 어쨌든 나의 힘이 쓰였다는 건 나 자신에게 참 기쁜 일이니까.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만족감을 채워줄 수 있었다면 나는 충분히 내가 할 일을 한 것이 된 거니까.
사실 그렇게 한 마디 해주는 것도 어려운 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언젠가- 왠지 크림슨이라면- 그런 한 마디라도 부담가지지 않고 편하게 꺼낼 것 같아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언제나 크림슨의 가면을 벗은 상태에서의 모습은 예상을 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냉정함 속에서도 왠지 조금의 따뜻함이 있지 않을까. 비록 그런 따뜻함을 보여줄 존재가 없긴 하겠지만.
"뭐, 이렇게 구구절절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는 얘기도 하고 싶고!"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목이랑 입이 좀 아픈 것 같다. 이렇게 말 길게 하는 건 의뢰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보니, 게다가 이렇게 일상에서는 더더욱 흔치 않으니까-♪
어떻게 보면 내 이야기만 늘여놓은 것 같지만, 뭐- 어때! 크림슨이라면 이해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