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기스] 211225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고 계셨는지요?
저는 걱정하지 않아도 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못 지내는 게 이상할 정도로 무난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요.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여행을 하고 있는데도 새로운 지역들이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발견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런 지역들은 도시처럼 여러 사람들이나 메카닉들로 북적거리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그대가 지내고 있는 숲처럼 한적하고 고요한 공간이 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곳이든 새로운 장소라면 다 마음에 들지만요.
숲이라고 하니,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시간이 종종 생각나곤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숲은 참 아름다운 풍경을 유지하고 있겠죠? 특히나 지금은 겨울에 가까운 계절이니 땅이나 나뭇가지에 눈으로 하얗게 가득 쌓여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꽤나 눈부시고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뭐, 그렇게 되면 역시 그대가 연구하는 것이라던지, 그런 게 조금 귀찮아지긴 하려나요?
여러 장소를 여행하며 다양한 것들을 깨닫고, 먹어보고... 그런 새로운 경험들을 늘 쌓고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겪었던 것들을 완전히 잊게 되는 건 아니죠. 여전히 그대와 함께 마신 차 한 잔이라던지, 그대가 연구하고 가꾸는 것들을 구경한 추억이라던지... 아직도 제 메모리 속에 남아서 과거를 회상할 때 그 기억을 다시 꺼내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생각해보니 최근에도 여전히 이런저런 식물들을 가꾸고, 연구하고... 가끔씩 시간이 날 때 차 한 잔을 하고 그러고 계시나요? 다른 분들이 챙겨주는 것에 비해 그대가 챙겨주는 것이 유독 더 몸이 따뜻해지고 누군가가 부품을 다듬어준 것도 아닌데 마치 부품이 자동적으로 다듬어지는 듯한 그런 기운이 들었거든요.
혹시 제가 마시는 차에 이상한 걸 타거나 그런 건 아니죠? 하하, 농담입니다.
저희들은 각자 자신만의 영역에서 무언가에 열심히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흥미롭습니다. 저는 이런저런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 새로운 메모리를 쌓아가고 있다면 그대는 여전히 그 숲에서 다양한 것들을 연구하며 새로운 메모리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사실 무언가를 연구한다는 것은 지금 들어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나에 끝까지 파고든다는 게 참 어려울 것 같거든요. 그만큼 인내심이 크지도 않을 것 같구요.
그래도 여행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때 만약 제가 무언가를 연구하게 된다면, 무엇을 연구하게 될 지 곰곰히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것의 답은 역시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인 여행 루트를 짤 수 있을까?'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지만요. 그래도 그런 답을 이끌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겠죠?
분명 이런 편지를 쓸 때에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는데, 정작 편지에 하나하나 글로 써내려 갈 때에는 그런 생각들이 언제 떠올랐냐는 듯 바로 다시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와중에도 갑자기 이상한 내용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될 때가 많았죠.
그래도 이상한 내용으로 흘러가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것 아니겠냐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글을 써내려가곤 합니다. 뭐, 단순히 제 소식을 알리는 편지인데 내용이 좀 이상해도 문제될 건 없으니까요? 오히려 이런저런 잡설을 써내려 가는 것도 이런 여행을 하며 쌓여온 경험같은 것이라고 하면 적당히 잘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대도 이렇게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잊어버려서 의도치 않게 새로운 내용을 생각해버린 적이 있었을까요? 왠지 궁금해지네요.
문득 갑자기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셨으려나요? 그래도 편지라는 게 언제쯤에 보낼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하하. 아무튼, 여전히 새로운 곳을 여행하다가 무언가 예쁜 장식들이 가득 달려있는 풍경의 도시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주변의 분들도 조금 특별한 모양새의 옷을 입는다던지, 무언가 특별한 음식을 가지고 간다던지- 하는 모습이 있어서 물어보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물어보니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온다고 하더군요.
크리스마스라... 사실 저희들은 굳이 이런 걸 챙기긴 하는가 싶지만, 왠지 주변에서 그렇게 기대에 부풀어서 잔뜩 준비하고 있으니 왠지 그런 분위기에 같이 뛰어들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죠. 그래서 뭘 할까, 싶다가 딱히 생각나는 건 없고 한편으론 왠지 그대 생각이 나서 가볍게 편지라도 써보는 것으로 노선을 옮겼답니다. 그래도 편지라는 게 서로 안부도 전하고 좋은 일이죠.
나중에 또 찾아가면 그 때도 차 한 잔 같이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 솔직히 그동안 그대는 어떤 이야기들을 쌓으며 시간을 보냈을지 내심 기대됩니다. 단순히 숲 속에서 연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 연구에 대해서 듣는 것도 즐거운 시간이니까요. 제가 직접 연구를 하진 않더라도, 누군가가 연구를 하고 그 연구에 대한 결과를 듣는 건 좋아합니다. 약간 대리경험- 이라고나 할까요?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따로 편지라던지- 그런 것들로 알려주세요. 뭐, 저희들같은 메카닉이 편지를 나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왠지 저는 이런 유기체의 감성이 마음에 들더군요. 솔직히 제 생각이나 경험담같은 걸 적는 것에도 부담이 없는 것이 편지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아무튼, 만나러 가기 전에 이것저것 잔뜩 챙겨서 방문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언제나 좋은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카르디스님.
언제나 든든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