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 220315

E / P 2022. 3. 15. 00:53

 

 

 


 

 

고대의 분지.

눅눅하고 이상한 기운이 아래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곳.

누가 보더라도 불길한 기운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서 오히려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곳.

 

 

열차를 타고 오거나, 끈적하고 기분 나쁜 수로를 통해서 오거나, 아니면 눈물의 도시의 험난한 길을 거쳐서 오거나... 아무튼 다양한 방식으로 이 곳에 오는 존재들이 많죠. 가끔씩 열차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 열차는 도대체 무엇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길래 모든 것들이 멸망한 와중에도 여전히 잘 작동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왕국의 기술력은... 꽤나 놀라운 것일지도.

 

저는 이 곳에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고 생각해서 꽤 오랜 시간을 여기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고대의 분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남아있는 문명들을 살펴보고 있으면 왠지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흥미가 생기더군요.

 

 

아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이 두 가지의 목적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단순히 이 지역에 대한 호기심으로.

두 번째로는, 이 지역과 더불어 이 아래에 있는 더 깊은 곳에 대한 호기심으로.

 

 

저는... 처음엔 첫 번째의 이유였습니다만 지금은 두 번째의 이유도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죠. 그렇게 이유가 바뀌게 된 것에는 어떤 동기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실 텐데, 당신의 생각이 정답일 것 같군요.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를 두 번째의 이유로 이끌어주고 유유히 사라지신 어떤 분에 대한 이야기를.

 

 


 

 

벌레, 기사... 다양한 모습을 가진 분들이 이 곳에 오는 것을 유유히 벤치에 앉아 구경하고 있던 중, 어떤 인상적인 분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어떤 분이든 그 분을 보면 바로 뇌리에 박힐 듯한 그런 모습을 가진 분이셨죠.

그 분은 마치 감염된 벌레들처럼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감염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무언가를 가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보통 감염이라고 하면 주황빛의 무언가에 잔뜩 물들어있는 모습이었지만, 그 분에게 물들어있는 것은 주황빛이 아닌 붉은빛의 무언가였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그 붉은빛의 무언가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평소같았으면 자연스럽게 그 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그 때만큼은 어떤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그저 바라보며 구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다른 존재들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겠지만, 도대체 어떤 존재가 그런 존재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그건 그렇고, 그런 분위기를 풍기며 이 곳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분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다면, 조용히 그 분의 뒤를 쫓아서 직접 알아보는 수 밖에 없겠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는 것 정도는 꽤 익숙하기도 하고, 만약 들킨다고 하더라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잘 빠져나가는 편이기도 해서 나름 자신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바닥에 붉은빛의 무언가를 뚝뚝 흘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어쩌면 묵직하면서도 비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 걸음걸이를 따라가면서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은 조금씩 더 깊숙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당시의 저는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렸듯 이 아래에 있는 또다른 무언가에 대한 것에 크게 흥미가 없었던 상태였기에 이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 어떤 것에 대비해야 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위험하다고 한들 얼마나 위험할까, 라는 생각과 함께 계속해서 망설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에도 나름 이유는 있습니다. 그동안 이 곳에서 저 아래로 내려가는 분들을 많이 봐왔고, 대부분의 존재들이 다시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저 아래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분들도 종종 있긴 했지만 위로 올라오는 것에 성공한 분들과의 비율을 따지면 그렇게 많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도 망설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분지의 아래에 존재하는 곳.

심연.

 

그 분은 그 심연에서,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요.

 

 


 

 

그 분께서는 이 심연이 낯설지 않은 듯 차분하게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곳은 제대로 된 길이 존재하지 않고 드문드문 떠 있는, 시커먼 무언가로 잔뜩 물들어있는 바위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험난한 것들을 밟고 아래로 내려가야 되는군요. 중간중간 길을 방해하는 몬스터들도 조심해야 겠습니다.

분지에 있을 때에만 해도 단순히 그냥 기분이 오묘해지는 검은 무언가이겠거니-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 심연에서 마주하는 이 검은 기운은 엄청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검은 무언가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게 아닌-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그런 비밀의 기운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아마 이 심연의 밑바닥까지 내려간다면, 그 기운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심연의 밑바닥으로 내려갈 때마다, 이제 빛이라는 건 아예 스며들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이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두워질 수록, 그 분의 붉은 무언가는 더욱 붉게 빛나고 있었죠. 마치 이 곳을 원한다는 것처럼.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내려갔을까요. 밑바닥에는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와 비슷한, 가면같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굳이 그런 것들 말고도... 마치 저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마냥... 뭐, 더 말하기엔 정리가 필요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드네요.

 

 

네, 뭐... 앞서 말했듯이 저를 '맞이하고' 있다고 표현했었죠. 그 곳에서는 그런 과거의 흔적뿐만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흔적들도 꽤 보였답니다. 예를 들자면, 저와 똑같은 모습의... 그림자, 라던지요. 그림자라기보단, 친족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요. 아무튼,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결국 저도 언젠가 저런 어둠의 그림자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마치 가족이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감상은 이쯤하고, 그 분께서는 어떤 모습일지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조금씩 붉은 무언가를 뚝뚝 흘려대면서, 마치...

그들과 하나가 되어가는 듯 온몸이 까맣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쩌면, 잠식되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까요.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은, 그들과 함께 잠식되어 안정을 취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잠식을 통해 그들의 경험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것일까요. 그것까지는, 제가 알 수 없는 영역이겠죠.

그렇게 그 분이 무엇을 하고 계실지 혼자서 상상하고 있는 동안, 제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 분이 조금 몸을 들썩거리다가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제가 그동안 뒤쫓아 다녔다는 것을 들키고 말겠군요. ...얼른 자리를 옮겨야겠습니다.

 

 


 

 

그렇게 제가 겪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과연 그 분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종종 그 분을 떠올리게 만드는 붉은 무언가가 이 주변에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먼 곳에 있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은 참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차서 늘 재미있단 말이죠. 그렇지 않나요?

앞으로도 더 다양한 일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