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 of the Lamb / 나린더] 221108
"...벌써 밤이군. 오늘은 꽤 피곤할 것 같은데."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더 많이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가끔은 각자 맡은 걸 더 열심히 할 때도 있는거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반복되는 하루도 어느새 태양은 저물고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달이 떠오를 때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하루가 지났다는 것에 대한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무심하게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체념일까.
아무튼 달이 떠올랐으니, 모두들 잠에 빠져드는 모습이 보인다. 분명 이 교단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나는 밤에도 열심히 일을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샌가 나의 목에 걸려있던 달 목걸이가 빠져있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뭐, 어쩌다보니 한 번 죽음을 경험했던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그걸 계기로 달 목걸이가 빠진 모양이다. 덕분에 잠이라는 걸 잘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괜히 이런저런 생각을 더 하고 있으니 피곤하다. 얼른 잠에 들기나 하자.
오랜만에 깊게 잠들고 있으니,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 느껴진다. 아니, 어쩌면 이 곳은 일반적인 곳과는 다른 세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막하고 고요한 곳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 상황이, 왠지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론 낯설다.
그런 오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어디선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크게 분노한 듯 외치는 듯한, 마치 이 세계처럼 모순된 듯한 분위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신자..."
...시끄러워! 누구나 다 똑같은 생각이었을 거라고...! 힘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 다 공통된 마음 아니었던가? 그저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아니면 딱히 그런 힘을 가지고 싶은 야망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던 주제에 괜히 참견하지 말란 말이다. 오히려 나를 배신자라고 욕하며 돌을 던지는 그 쪽들이야말로, 겁쟁이나 다름없으면서. 입만 나불거릴 줄 아는 존재들이란.
마치 신기루처럼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질 듯한 실루엣만 남긴 채로, 또다른 어딘가에서 똑같은 모순적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패배자..."
...난 분명 그 입 닫으라고 경고했는데. 나의 힘을 다른 존재에게 빌려주었을 뿐이고, 그 힘에 쓰러진 것이 어째서 패배자가 되는...
아무튼 시끄럽다. 괜히 그런 식으로 나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면, 다 소용없고 부질없는 짓이니 전부 꺼져버렸으면 좋겠군. 나를 이런 세계에 끌어들인 것도 너희들의 짓인가? 기껏 깊게 잠들었다고 생각했더니만 괜히 아침에 일어나면 더 피곤해지기만 하겠는데.
...한편으론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힘에 제압당하는 건 패배라는 것을 부정하기엔 너무나 큰 실책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인정했다간 저 모순적인 목소리에 또다시 패배를 겪는 것만 같아서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물론 저 모순적인 목소리는 자신의 승리나 패배따위엔 관심도 없겠지만, 그저 내가 이렇게 또다시 무너지는 걸 즐겁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겠지만.
괜히 더 있어봤자 녀석들의 귀찮은 목소리만 들을 것 같아서 깨어나고 싶지만, 한편으론 더 이 곳에 머물고 싶기도 했다. 왜일까? 그 녀석들의 목소리가 벌써 익숙해졌나? 아니면... 그들의 짧은 말에 내가 조금씩 공감하고 있는 걸까?
...아니. 난 절대 그 목소리에 인정하고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남들에게서 배신자, 패배자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쪽에 가까울지언정, 난 절대로 내 의견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는 나만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또 어디선가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헛된 결말..."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목소리만으로 나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게 더 헛된 결말일지도 모르지. 괜히 시간낭비 하지 말고, 네 녀석의 갈 길이나 알아서 잘 찾아갔으면 좋겠군. 그렇지 않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 그 망할 양에게 강제로 끌려오듯 교단에 정착한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결말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이 될 것이라는 결말은, 내가 아닌 그 망할 양이 독차지하게 되었으니. 그리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이 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떠벌리고 다니던 존재는... 이렇게 추종자 신세가 되었지.
힘을 빼앗긴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었다. 힘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단순히 힘만 빼앗기는 게 아닌, 사실상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빼앗긴 존재는, 더 이상 미래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의 나처럼.
조금씩 그 모순된 목소리에 굴복하려고 하는 찰나, 나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감촉에서부터 적어도 이건 그 모순된 목소리가 아닌, 또다른 존재가 나의 곁에 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돌아보았을 땐...
"...샤무라?"
주교의 모습 그대로, 오래 전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샤무라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보기만 하다가, 조금씩 샤무라는 입을 열었다.
"비록 우리들을 배신했더라도, 당신은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을 지어니."
"...이런 나를 기억해봤자 좋을 건 없다."
이번에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약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샤무라의 손을 잡고 있었을까? 그 때의 내가 지금처럼 현실을 깨닫고 야망을 절제한다면 샤무라의 손을 잡고 있겠지만, 아마 야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기회를 노릴 것 같다고 혼자서 생각하기도 했다. 적어도 지금의 어린 양이 아닌, 다른 존재를 나의 하수인으로 부려서 나와 함께했던 주교들의 심장을 빼앗으라고 했겠지.
이런 것들도 말하는 게 좋을까 싶었지만, 결국 말하지 못했다.
"지금의 내 모습은, 배신자이면서 동시에 패배자인 나에게 걸맞는 결말이다."
"패배라는 것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
"다시 일어서는 기회? 그런 건 이미 힘을 잃으면서 다 사라졌다."
"나린더. 기회는 힘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가. 문득 생각해보면 꼭 힘을 가져야만 기회가 생기는 건 아닌 것 같다는 깨달음이 들기도 했다. 망할 양의 교단의 추종자가 된 이후로 나를 그동안 찾아다녔다며 다시 나를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찾아온 추종자라던지, 대뜸 나를 찾아와서 신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며 주인으로 섬기고 싶다는 추종자가 있기도 했었으니... 그런 것들은 내가 가졌던 힘과는 별개의 일이겠지.
하지만 여전히 이런 쪽의 기회가 아닌 다른 쪽의 기회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긴 했지만, 샤무라가 하는 말이라면... 그냥 넘길 수 없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졌던 존재였으니, 그 말에는 그 어떤 상황보다도 더 강한 확신이 있을 것이리라. 그리고 그 확신을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샤무라."
고마운 마음에 자신의 어깨에 올린 샤무라의 손을 잡아보려고 손을 올려보았으나, 잡히는 것은 그저 나의 어깨 뿐이었다. 이 곳은 꿈의 세계였으니 샤무라의 존재도, 이렇게 손으로 잡히지 않는 그림자이면서 신기루같은 존재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말을 꺼내주는 그 모습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샤무라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헛된 결말이 맞군."
그 말을 들은 샤무라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을 꺼냈다. 마치 나를 위로해주고, 앞으로의 미래를 응원하는 것처럼.
"결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누군가에겐 끝나지 않았다는 반전이 될 수도 있음을."
분명 위로가 되고 응원하는 것이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내가 만든 결말이, 누군가에겐 결말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긴, 내가 만들었던 결말을 뒤엎어서 새로운 결말을 만든 게 어린 양이었으니, 또다른 누군가는 이것이 결말이 아닌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겠지.
마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읽기라도 한 듯 샤무라는 미소지으며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처럼.
"언제나, 또다른 곳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말기를."
그 말과 함께, 샤무라는 조금씩 한 줌의 재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샌가... 주변에서 들리던 모순된 목소리들도 전부 사라졌다. 마치 샤무라가 그 목소리들까지 다 끌어안고 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던 불안하고 절망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닐까.
...그리고, 조금씩 태양이 뜨기 시작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오늘은, 꽤나 깊게 잠드셨네요."
"평소에는 잠이 없어서 늘 우리가 잠들었는지 확인하던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웬일이람~"
늦잠을 잤나, 싶을 정도로 다른 추종자들은 이미 일어나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 나를 찾아온 추종자들도 나를 깨우러 온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어났으니 뭐...
아무튼 일어난 내 모습을 본 추종자들은 싱긋 미소지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말을 꺼냈다.
"오늘도 부디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어떤 꿈이었는지, 나중에 말해주면 좋을지도~ 그럼 나도 할 일을 하러 가야지!"
꿈을 끌어안고, 다시 현실을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