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자캐

[크로셀 / 하피사] 230219

E / P 2023. 2. 19. 05:15

 

 

(* 원래 이 공간에는 글을 쓰면서 들었던 BGM을 올려두는 편이지만,

이 글에서는 왠지 각자의 취향 음악에 맡기며 읽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음악을 들으시면서 이입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오늘은 발걸음을 조금 일찍 멈춰보려고 합니다. 이 근처에 마을이 있는 걸 발견하기도 했고, 그동안 좀 많이 걸어다녀서 그런지 피곤한 감도 없지 않게 존재했거든요. 모험은 언제나 두근거리게 만들긴 하지만, 두근거리는 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컨디션이란 건 언제나 무엇보다도 제일 우선시해야 되는 법입니다.

그나저나 이 마을은, 조금 분위기가 특이한 것 같기도 하네요. 마치 도시의 각자 따로 활동하는 분위기가 아닌, 시골처럼 모두가 단합해서 이 마을을 이끌어나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이 마을의 어딘가에 이 마을을 대표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굳이 제가 그런 것까지 파헤쳐가며 이 마을에 오랫동안 머무를 건 아니기 때문에 그러려니하며 잠깐 이 곳에서 쉬었다가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을에서 조금 구석진 곳에 있는 공터에 느긋하게 앉아 가지고 있던 오카리나를 가볍게 연주해봅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이런 악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에 신기하게 여기실 수도 있겠네요. 정확히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이런 악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연주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오래 전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악기를 조심스럽게 챙기고 다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이 낫만큼이나, 이 오카리나도 나름 오랜 세월동안 저와 함께 다닌 동료같은 악기나 다름없는 것이죠.

그래도 이 악기가 있어준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떠돌이 생활보단 꽤나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악기를 이용해서 연주를 해 주는 식으로 낯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이런저런 도움을 받는다던지, 혹시나 나중에 큰 일이 생겼을 때 이 악기를 이용해 저를 도와줄 사람들을 부른다던지... 여러모로 쓸모가 많거든요. 만약 이 악기가 없었더라면... 단순히 이 낫을 이용해서 좋든싫든 상대를 썰어버려야 되거나, 아니면 낫을 쓸 시간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겠죠.

 

마치 저의 또다른 목숨과도 같은, 그런 악기였습니다.

 

 

아무래도 마을의 구석진 곳이다보니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딱히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진다던지, 인기척이 느껴진다던지 하는 건 거의 없었습니다. 애초에 이런 걸 노려서 구석진 곳으로 온 것이기도 하지만요.

그러나 새로운 사건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기 마련이었죠.

 


 

사실 악기를 연주할 때에는 눈을 감고 연주를 하다보니, 만약 누군가가 조용히 저에게 다가온다면 제가 눈치를 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시선이나 인기척을 느끼는 것도 늘 민감하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연주에 집중하게 된다면 그런 걸 눈치챌 시간도 없으니까요. 연주에 집중해야 되는데 그런 시선에 집중하게 되어버리면 당연히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없을 테니까요. 누군가가 말을 걸기 시작해야 그제서야 누군가가 곁에 있구나, 하고 느끼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연주를 하다가 조금 연주가 조용해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통해서 어떤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저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소리에 조심스럽게 한쪽 눈만 조금씩 뜨자 눈 앞에서 어떤 분이 저를 흥미롭게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곤 악기를 가볍게 내려놓고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 분이 저를 보며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아름다운 연주였소."

"아, 감사합니다. 누가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그저 음악을 들으러 온 것일 뿐이니."

"그러면... 다시 계속 연주해 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연주를 이어갔고, 연주가 끝났을 때에는 마치 흡족한 듯한 모습의 표정으로 저에게 제안을 하듯 말을 꺼내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사실 이미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이 연주를 혼자서만 듣기엔 아쉬울 것 같네만,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장소에서 연주해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거절할 이유도 없죠."

"그럼, 지금 바로 안내해주겠소. 조금 험난할 수도 있으니, 잘 따라오시오."

 


 

조심스럽게 이 분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데, 확실히 마을 내부가 아닌 마치 또다른 공간의 어떤 곳으로 가는 것 같이 꽤나 먼 곳까지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으슥한 곳에도 또다른 마을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마을이 아닌 다른 어떤 무언가가 있는 걸까요?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머지않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겨서 도착한 곳은 도시의 풍경도 아니고, 마을의 풍경도 아닌... 교단의 풍경이었습니다. 처음엔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사실 이런 곳에 교단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그런 당황스러움이겠죠. 왜냐면... 이미 저도 이런 교단엔 익숙한 몸이니까요.

 

 

주변을 둘러보며 교단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으니, 사방에서 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이 곳에선 당연히 외부인일 것이고... 이 분의 안내에 따라 이 교단에 들어오는 새로운 추종자인가, 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저를 이 곳으로 데려온 분도 그 시선을 이미 다 눈치채고 있었는지 저를 보곤 어딘가를 가리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분께서 가리킨 곳에는 꽤나 넓고 다양한 장식품들이 가득한, 마치 무대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분들을 향해 손짓을 했고, 그 손짓에 다들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분이 보통의 존재는 아니라는 걸 대충 눈치챌 수는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지자, 이 분께서는 저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저 곳에서 방금 전의 그 연주를 모두에게 들려줬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한 번... 열심히 연주해 보겠습니다."

 

 

사실 방금 전의 그 마을에서 했던 연주가 과연 이 교단의 분위기에 어울릴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조금 고민이 있긴 했었습니다만... 그래도 나중에 이 곳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음악을 가져오면 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이 분께서 직접 그 연주를 다시 들려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으니... 그런 부탁을 거절하고 다른 음악을 연주하기에도 조금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연주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에서 느껴지던 시선이나 기운같은 것들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그런 시선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오히려 더 늘어나겠죠.) 제가 이런 것에 집중하다보면 발생하는 일종의 본능같은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네요. 그래도 이런 본능 덕분에 연주에 부담이 없다는 건 나름대로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주 도중의 잠깐 조용해지는 부분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같은 것이 조금은 들리긴 했는데, 아무래도 제 연주를 마냥 나쁘게 생각하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치 고요하고 무거운 소리가 아닌 꽤나 즐겁고 흥겨운 목소리에 가까웠거든요. 제 연주가 이런 곳에서도 잘 통하는 것 같아 기쁩니다.

 

 

그렇게 온 정신을 연주에 집중하니 시간도 꽤 지났고, 연주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났음을 알리듯 악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다들 만족스러워 하는 반응을 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 곳으로 데려온 그 분께서도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저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다시 들어도 만족스러운 연주였소.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저는... 크로셀이라고 합니다."

"크로셀."

 

"앞으로도 이 곳에 찾아와서 연주를 해 줄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구나."

"아, 그건..."

 

 

잠시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고민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많아지면 저에겐 좋은 일이니까요.

 

 

"당연히 가능합니다. 만약 괜찮다면... 다음에는 다른 동료를 데려와도 괜찮을까요? 더 풍성한 연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허락해 줄 수 있소. 앞으로도 만족스러운 연주를 부탁하오."

"저야말로,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사실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이 분이 단순히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서 저를 이 곳에 데려온 게 아니라, 이 곳에서도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어서 모두에게 이 연주를 보여줄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잠깐 무릎을 꿇고 온몸으로 예의를 표하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저같은 떠돌이가 높으신 분과 같은 눈높이로 이야기하는 건 너무 예의없는 일이겠죠?"

"예의가 넘치는 건 마음에 드는구나. 하지만 항상 꼭 그럴 필요는 없소. 그대는 나를 섬기는 추종자는 아니니."

"물론 저는 외부인이긴 하죠. 그래도 지켜야 될 예의는 지켜야 되는 것이 삶의 이치라고 생각하기에, 일단은 이야기라도 꺼내보는 게 좋은 일이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도 적당히 나누면서 어느정도 타협도 보았으니, 꿇었던 자세를 거두며 다시 일어났습니다. 확실히 이렇게 누군가에게 예의를 표현하는 건... 좀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하네요.

 

아니, 정확히는...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으니 기억 속에서 잊혀질 법도 한 시간이었죠.

...지금은 이렇게 과거에 머무르고 있을 시간이 아닌 것 같네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제가 하려던 질문을 꺼냈습니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당신의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이 교단을 이끄는 교주, '하피사' 라고 하오."

"그렇군요.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건 역시 제 위치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 앞으로는 교주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오래 전 그 곳에서도, 그 곳의 높은 분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니까요.

'주인님' 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원래같았으면 이 곳에서 연주가 끝나자마자 마을로 돌아가려고 예정을 두긴 했었습니다만... 연주가 생각보다 길었던 것도 있고 이후로 다양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꽤나 늦어졌습니다.

어쩔 수 없지만, 이 곳에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다가 가는 건 어떨까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 보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혹시... 이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만약 거절을 받는다고 해도... 뭐, 떠돌이 생활로 늦은 밤에 돌아다니는 것도 익숙해졌으니... 어떻게 잘 헤쳐나가면 되겠죠.

그렇게 오늘 하루도 새로운 경험을 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