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tL

[크로셀] 230513

E / P 2023. 5. 13. 01:16

 

 

 


 

 

추억.

좋은 단어죠.

 

일단 적어도 저에겐 그렇습니다.

 

 

추억이라고 하면, 오래 전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것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저에게 추억이라고 할만한 건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게나마 존재한다는 것이 다행인 게 아닐까요? 누군가에게 추억에 대해서 물어볼 때, 그리고 누군가가 저에게 추억에 대해서 물어볼 때... 답할 수 있는 게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

한편으론... 추억이라는 것은 늘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도 새삼 깨닫기도 합니다. 오래 전에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들이 지금은 조금씩 흩어지고 잊혀지는 것이 느껴졌으니까요. 이렇게 떠오르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처음엔 슬프고 괴로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젠 그냥 익숙하네요.

 

...왜일까요? 결국 이런 것들은 잊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걸까요? 사실 그게 정답인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걸 납득하며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남아서 잊을 만하면 괴롭게 만드는 것보단... 아예 없어지는 게 낫잖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족의 얼굴들이 선명하게 기억이 났는데, 이제는 희미하게 떠오를듯 말듯한 그런 상황입니다. 마치 물감에 물이라도 끼얹은 것마냥, 멀쩡히 존재하던 사진에 불이라도 붙혀서 그을림이 생긴 것마냥... 이제는 제 가족의 이름마저도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잊었습니다. 그냥 가족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

이렇게 흩어져가는 기억들을 더듬고 있으니, 주인님께서 종종 꺼내셨던 말이 떠오르곤 합니다. '끈질김' 이라던지, '과거의 아름다움' 이라던지... 앵커딥을 표현할 때 꺼내셨던 말이죠.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앵커딥과 '끈질김', 그리고 '과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서로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겐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겠지만, 원래 그런 생각들은 다 각자의 살아온 방식이나 배워온 지식을 통해서 각자 조립해가는 것이니까요.

 

알다시피, 앵커딥은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성전입니다. 바다라고 하면 보통 깊은 수심이라던지, 가라앉는다던지... 그런 게 연상되곤 하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주인님께서 하셨던 말들도 의외로 재미있게 연관짓곤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끈질기게' 발버둥을 친다던지, '과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바다 속으로 깊게 내려앉는다던지... 그리고 지금 앵커딥의 상황을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겠죠. 그들은 교주님에게 발버둥치며 '끈질기게' 살아남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과거의 아름다움'만을 간직한 채 영원히 가라앉게 되었으니.

 

 

하지만 누군가는 그 '과거의 아름다움'을 다시 찾아내기 위해 깊은 바다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들기도 합니다. 저는 단순히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이교도들을 베어버리는 역할을 할 뿐이지만, 앵커딥을 탐험하면서 그런 분들을 발견하곤 했죠.

 

누군가는 그 가라앉은 '과거의 아름다움'을 다시 끌어올리기보단, 가라앉은 곳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계속 유지하도록 만들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고 있고, (=크툴)

또다른 누군가는 그 '과거의 아름다움'을 끌어올려서 현재의 아름다움으로 만들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고 있죠. (=라켄)

그리고 그런 끈질김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존재도 보아왔습니다. (=알메르)

 

 

어떤 쪽이 정답인지, 어떤 쪽이 잘못된 길인지... 저는 그런 것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일은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걸 보고 있을 당신은, 정답을 생각하고 계시나요? 아니면, 그들의 이야기를 멀리서 지켜보며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지 바라보는 쪽인가요?

 


 

늘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고, 아직도 계속 이어가고 있는 다짐이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과거를 발판으로 삼아 미래로 나아간다' 라는 다짐이었죠.

 

주인님과 다시 재회하기 전, 온 세상을 떠돌아 다니면서 그런 분들을 많이 봤었습니다.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과거에만 묶여있는 채로 세상을 비난한다던지, 자신을 깎아내린다던지... 그런 모습들을 말이죠. 처음에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조금씩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가길 원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워낙 떠돌이의 삶에 익숙해져 있었고... 주인님을 다시 찾아야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쉽게도 자리를 비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득 지금 그 분들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궁금해지긴 하네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적어도 주인님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과거에 묶여있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과거에 묶여있다간, 주인님을 다시 찾는 과정에 발목이 잡힐 테니까요. 미래에 만나게 될 주인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과거의 영광을 잔뜩 가지고 있었던 주인님을 생각하는 건 어쨌거나 저에겐 독이 될 테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건 정말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 덕분에 지금은 다시 주인님과 재회하여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허어, 그냥 단순히 제 생각을 잠깐 꺼내놓는 시간을 가졌을 뿐인데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지게 될 줄은 몰랐네요. 너무 길어지면 듣는 존재의 입장에서도 지루할 것이고, 저도 슬슬 떠오르는 이야기가 없는 관계로... 적당히 줄여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그쪽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저는 사실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보다 다른 존재의 이야기를 듣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저 그쪽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한 일종의 미끼에 가까울 뿐.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