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에게 그저 멍하니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솔직히 조금 짜증이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런 애송이 녀석한테 순순히 당하게 될 줄이야…. 방심하고 있다가 의도치 않은 곳에서 허점을 노림당했군. 다음엔 내가 제대로 한 방 먹여줄테니 그 때까지 그 발명품 망가뜨리지 말고 제대로 간직하고 있어라.
괜히 아무도 없는 기지에서 투덜거리며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있으니 뭔가 나 자신이 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고 그저 나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을 뿐인데 갑자기 몰려오는 이 부끄러움은 대체 뭘까…. 나를 괴롭히기 위한 제로로 녀석의 공작일까…. 아, 아니다. 괜히 더 쓸데없는 생각으로 넘어가지 말자. 그저 내가 그 녀석에게 순순히 당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일 뿐이니까.
그렇게 고개 푹 숙이며 걷다가 저 멀리 누군가가 이 근처를 지나가려고 하는 듯해서 잠시 고개를 들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그런데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 같았는 게, 항상 평범하게 보던 파란 녀석이었으니까. 그런데 뭔가 파란 녀석을 보자마자 이상하게 입에서 본능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야."
"앗, 갑자기 무슨 일이심까?"
"그냥 좀 할 말이 있어서."
"혹시 부탁이라도 있으심까?"
"글쎄, 부탁일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멍하니 걷다가 파란 녀석이 보여서 왠지 갑자기 이 녀석을 괴롭히고 싶다는 마음이 불타올랐다. 딱히 네 녀석을 괴롭히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혼자 당하긴 좀 싫었달까. 그러니까 막상 아무 생각도 없다가 누군가가 보이면 갑자기 막 여러가지 감정이 살아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다. 어쨌든 네 녀석이 먼저 보였으니 (사실상 지금 보이는 게 네 녀석 아니면 없기도 하지만) 네 녀석이 좀 타겟이 되어줘야겠다.
"무슨 부탁이심까?"
"그렇게 큰 건 아니고, 하나 좀 심부름을 시켜볼까 해서."
"심부름이라면 제가 잘 합죠! 무슨 심부름임까?"
"뭐 간단한 거 하나만 해 주면 되니까. 그리고 나에게 소감을 말해주는 거지."
"에이, 간단하네요! 한 번 해보고 오겠슴다!"
"자, 잠깐. 내가 길안내를 하도록 하지."
"갑자기 무슨 일로 호의를 베푸심까?"
"아무래도 모를 것 같아서. 좀 다른 곳인지라."
사실 이 녀석과 조금 시간을 끌면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기에 그 생각을 없애기로 작정할 계획이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에서 이미 더 의심할 것 같지만, 다행이랄지 이 녀석은 의심보단 이렇게 대해주면 더욱 마음을 풀어버리는 녀석이니까 상관없어.
아직까지 거리가 좀 되는 것 같다. 도대체 이렇게 먼 거리에서 어느새 여기까지 도달한거냐…. 그저 고개 푹 숙이고 앞으로만 걸었을 뿐인데 말이지. 아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딱히 이렇게 먼 거리라고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나보다. 어쨌든 파란 녀석은 나와 이렇게 잡담하는 게 자꾸 신기한지 계속 이것저것 여러 질문들을 아주 캐묻고 있었다. 하나하나 답해주려니 입이 아파서 짜증날 것 같지만 이번 한번만 해주는건데 이 정도는 해줘도 괜찮지 않나 싶어서 느긋하게 마음을 가지고 하나하나 대답해주고 있었다.
"아직 한참 남았슴까?"
"이제 거의 도착이다. 솔직히 이렇게 먼 곳일줄은 몰랐는지라."
"괜찮슴다! 병장님이랑 같이 이야기하니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슴다!"
"하, 그러냐. 잘 따라오기나 해라."
"알겠슴다!"
그렇게 녀석을 잘 보채주면서 걷다보니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근처에 쉴만한 곳이 있긴 하니까, 나는 여기서 쉬고 저 녀석은 저 안으로 들여보내면 되겠다. 녀석은 끝까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 느긋하게 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다녀오겠슴다!"
"그래. 잘 다녀와라."
"위험한 거 아니죠?"
"안 위험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알겠슴다!"
글쎄, 솔직히 안 위험한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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