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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 of the Lamb / 나린더] 221010 -화가-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건 어떨 땐 단순하고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었다. 물론 지금의 그에겐 딱히 그런 감정보다는 어린 양의 아래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는 그 자체가 더 신경쓰이고 한숨이 나올 지경이겠지만.

어린 양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밤이 되면 잠을 자고... 그렇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다른 새로운 것을 생각할 시간은 많았지만 그는 굳이 실천하려고 하진 않았다. 어차피 다른 걸 해봤자 얼마나 색다른 걸 하겠다고... 라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그런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한 준비물도 그에겐 어지간히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저 다른 추종자들과 함께 일을 하고 어린 양을 숭배하고... 그런 나날들을 보냈다.

갑자기 그의 흥미를 이끄는 그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어린 양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있던 중,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추종자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굳이 몰래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다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고, 그 추종자들도 딱히 그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어서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있는 존재들은 다 들었을 것이다.

 

 

"이 동백꽃을 잘 다듬으면 붉은 색소로 쓸 수 있을까?"

"아마도...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어디다 쓰려고?"

"그냥 그렇게 색소로 만들어서 장난치고 그러면 재밌을 것 같잖아~"

"...역시 참 한결같은 쓰임새구나."

 

 

색소라는 말에 문득 어떤 생각이 지나가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렇게 큰 관심은 없던 것이었지만, 왠지 근처의 벽같은 곳에다가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단순히 색소라는 말만 듣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후에 따라오는 추종자들의 대화와 과거에 그가 들었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이라는 요소가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근데 그걸로 장난을 친다는 건... 그림같은 건가?"

"아마도!"

"...갑자기?"

"원래 시간이 지나면서 마지막까지 남는 건 사진같은 거랬어~ 그림도 잘 보관하면 끝까지 남잖아?"

"흠, 틀린 말은 아니네."

 

 

마지막까지 남는 것.

어차피 그는 마지막이라는 게 없지만, 어린 양을 따르는 추종자들이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추종자들의 삶은 마지막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런 그림같은 것을 남겨둔다면 후대에 새로 이 교단에 들어올 추종자들이 그동안 이 교단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에게 여러모로 나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 없기 때문에, 다른 생명들의 마지막을 대신해서 남겨주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하던 일을 마저 다 끝내고 어린 양에게 가서는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어린 양이여, 혹시 이 주변에 그림을 남길만한 벽이 있나?"

 

 

어린 양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곤 벽이 없진 않다며 필요하다면 저 벽을 써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그림에 필요한 재료들을 지원해주긴 했는데, 나머지는 스스로 만들어야 될 것 같다며 괜찮냐고 물어보는 말에 그는 "그런 건 상관없다. 나를 도와줄 자들이 있으니." 라는 말과 함께 재료들을 받아들였다.

 

 


 

 

...

재료들을 받아든 건 좋았는데, 정작 이렇게 벽 앞에 서 있으니 무엇을 그려야 될 지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원래 의욕은 엄청 앞서도 막상 눈앞에 있으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그런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첫 시작으로 그려볼만한 것이 떠올랐다.

첫 시작이니만큼, 벽의 제일 왼쪽으로 옮겨서는 붓을 잡아본다.

 

 

"...첫 시작으로는, 역시 이 내용이 좋겠지."

 

 

그는 붓을 잡고는 이런저런 내용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세련된 그림이라기보단 오래 전부터 종종 문화재같은 것으로 볼 수 있었던 벽화나 민화같은 것에 가까운 그림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의 그림이었기에 '누군가의 마지막을 남긴다' 라는 점에서는 합격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의 아래에는 그 그림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짧은 문장을 적어두거나, 필요로 할 땐 꽤 긴 설명을 넣기도 했다.

 

 

『오래 전, 죽음과 다른 주교들이 있었다.』

『죽음은 다른 주교들을 배신했다.』

『죽음은 다른 주교들을 없애길 원했다.』

『죽음은 하수인을 만들어 다른 주교들을 하나둘 죽여나갔다.』

『진실을 깨달은 하수인은, 결국 죽음마저도 굴복시켰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적어도 이 교단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어린 양과 추종자들은) 내용이지만, 그래도 새로운 추종자가 들어왔을 때를 대비해서 남겨놓는 그림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고, 이제 이 뒤에 적을 내용들이었다. 무엇부터 그림으로 남겨둘 지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그림으로 남겨두는 것이 이야기의 진행에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가볍게 자신의 추종자들을 그림으로 남겨둔다.

그림 아래에는 「죽음을 따르는 생명.」 이라는 문장과 함께 그 아래에 『죽음의 권능을 잃은 자를 믿는 그들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있기에 죽음은 생명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라고 이런저런 설명을 적어놓았다.

 

참고로 죽음을 따르는 두 생명은 지금도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물감같은 재료가 부족할까봐 조용히 재료들을 보충해주고 다시 자신의 일을 하러 가고 있었다. 아마 두 추종자들도 그렇게 자신의 주인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내심 신기하긴 했겠지만, 적어도 주인님에겐 좋은 변화라고 생각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그림으로 벽을 채우다보니 어느새 그림 하나 정도만 그릴 수 있는 공간이 남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역시 이렇게 빈 공간으로 놔두기엔 좀 아쉽고 허전하기도 하니 마지막을 그럭저럭 장식해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붓을 잡곤 조금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공간에 들어간 그림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와 더불어 어린 양을 따르는 추종자들, 그리고 어린 양까지 그 곳에 오밀조밀 넣으며 그림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그려진 마지막 그림 아래에는 「생명의 삶.」 이라는 문장과 함께 『그들은 마지막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이 즐거움을 한가득 안은 채 새로운 세계를 여행할 것이다.』 라는 설명을 적어두었다.

분명 이렇게 그가 남긴 그림과 그가 남긴 그림에 있는 추종자들은, 이런 기억들이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것이고, 새로 들어온 추종자들도 '과거에는 이런 분들이 있었군요.' 라며 마음 속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새로운 벽이나 공간을 찾아봐야겠군."

 

 

그림을 완성한 그는, 나중에 다시 그리게 될 그림을 대비하기 위해 공간을 마련해두기로 했다. 그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어린 양도 그가 일하고 있을 때나 잠들었을 때 몰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한 곳에서 추억을 쌓으며 살아간다.